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문단 편집) === [[리크루트 사건|리크루트 코스모스 사건]] === 1988년 6월 가와사키의 하급 공무원 1명이 외부에 양심고백을 함으로서 세상에 내막이 드러났다. 내부정보를 활용해 리크루트 코스모스[* 일본 굴지의 구인구직정보 회사인 리크루트의 자회사. 역시 부동산 사업을 하던 곳이다.] 주식을 매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시인하고''' 사임한 것이다. 당시 리크루트 회장이었던 에조에 히로마사가 자사 관련 입법 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관료,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선물했던 것.[* 당시 주식을 받았던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NTT 회장,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회장 등 약 50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법무대신은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사임했으며 대장대신도 물러났다. 거기다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일본 총리]]도 리크루트 주식으로 1억 5,0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몇 달 뒤 드러났다.[* 당시 총리를 대신해서 현금을 받은 비서는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퇴했고 차기 총리주자였던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아베 신타로]]가 일보 후퇴해야 했다. 그래서 자민당은 당시 총리직과는 자리가 멀어 보였지만 청렴한 관료 이미지가 많이 부각됐던 [[우노 소스케]]를 후임 총리로 지명했는데 우노도 이후 불륜 혐의가 드러나며 취임 두 달 만에 사퇴했다. 이후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감했고 소비세 신설문제와 함께 엮여 1989년 7월 23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처참한 성적을 받았다. 이전에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민당 참패!'''' 타이틀이 뜨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차에 개선의석의 1/3(126석/ 총의석 252석)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총의석에서도 과반에 18석씩 미달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자민당 입장에선 이보다 처참할 수 없는 선거결과였던 것. 오죽하면 다음 해 치러질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중심의 야당연합이 압승하여 [[55년 체제]]가 끝장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면서 55년 체제 붕괴는 몇 년 더 늦춰졌지만... 우노의 사퇴 이후 후임 총리로 선출된 [[가이후 도시키]]는 너무나도 커진 버블을 잡기 위해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이 결국 1992년 급격한 버블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불황을 낳아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사건이 간접적으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큰 사건의 단초를 제공해 버린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